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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옥.김영조의 '일본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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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3편 제49대 고닌천황, 백제여인 고야신립과 사랑에 빠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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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05일(화) 12:32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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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왕(天智天皇626-672)이 왕좌를 물러난 이후 770년까지 일본왕실은 100여 년간 천무왕(天武天皇, 673-686)계가 왕위를 물려받고 있었으므로 천지왕계의 손자인 고닌은 왕위계승 따위는 바라볼 수 없었다. 거기다가 할아버지 대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을 보면서 염증을 느껴 일찌감치 왕의 자리를 체념하고 정치적 야망을 접은 채 술로 지새우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었던 고닌.
그때 만난 여인이 고야신립이었다. 고야신립은 멸망한 나라 백제계 왕손이다. 정권을 잡게 될 희망 없이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던 고닌에게 그녀는 혜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빛이요 희망이요 길이 되어준 인생의 반려자 고야신립은 고닌과 사이에서 첫딸 능등내친왕(能登内親王, 노토나이신노우)에 이어 훗날 간무왕이 되는 산부왕(山部王,야마베오우)과 막내 사와라왕( 早良親王)이 태어났다.
세 남매를 낳은 고야신립이지만 처음부터 정실부인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다. 남편 고닌은 고야신립을 사랑했지만 고야신립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에서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집권 중인 성무왕(46대)의 딸 이노에(井上内親王)와 정략결혼을 하고 만다.
그러나 고닌의 마음에는 오로지 고야신립 밖에 없었다. 백제여인 고야신립은 누구보다도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정실부인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자상한 여자였다. 실의에 빠진 고닌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도운 여인이 바로 고야신립이다.
이에 견주어 이노에는 친정아버지가 현재 왕이라는 것을 기화로 거들먹거리고 남편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둘 사이에 애정이 싹틀 리 없었다. 형식적인 혼인관계일 뿐 고닌은 정실부인 이노에와 점점 멀어지는 대신 사랑스런 고야신립과는 더 가까워졌다.
그러다 고닌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후계자 없이 죽은 48대 쇼토쿠왕(称徳天皇, 718-770)의 죽음이었다. 고닌의 나이 62살 때 일이다. 강화도에 들어가 나뭇짐이나 지면서 한세상 보내다가 뜻밖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25대 철종임금처럼 일본판 강화도령이 고닌왕이다.
일본판 강화도령 고닌왕(光仁天皇) 62살로 등극
일본 역대 왕 중 최고령으로 왕위에 오른 고닌은 62살 되던 해인 서기 770년 제49대 일본왕으로 화려한 등극을 하게 된다. 사실 고닌왕이 49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지와라씨를 포함한 막강한 호족들의 덕이며 후지와라씨는 할아버지 천지왕의 손자인 고닌을 언젠가는 왕좌에 앉히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대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전에서 패해 복수의 칼을 갈던 후지와라계의 활약이 없었다면 고닌의 왕위 등극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왕좌에 오른 고닌에게 이내 닥쳐 온 고민은 차기 왕좌였다. 정상대로라면 고닌과 정실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 오사베(他戸親王)가 차기 왕이 되는 게 순서지만 고닌은 사랑하는 백제여인 고야신립과의 사이에 낳은 야마베(山部)가 마음에 걸렸다. 정략결혼 후에도 고닌은 고야신립을 정실부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닌은 고심 끝에 중대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 정실부인과 차기 왕위 서열 1위인 왕자에게 모함을 씌워 유배를 보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10년 동안 차지했던 왕위는 백제여인 고야신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야마베에게 돌아가게 했다. 62살의 고령으로 등극한 고닌은 10년간의 통치 끝에 72살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 교토의 신으로 추앙받는 간무왕이다.
아버지 고닌의 왕위를 물려받은 간무왕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그간 푸대접받고 살았던 한풀이를 하듯 어머니 고야신립의 지위를 올려준다. 즉위 후 곧바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추대했으며 8년 뒤(789년) 어머니 고야신립이 죽자 황태후(皇太后)로 받들어 교토 천도(794년)와 함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 모시게 된다. 이어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추증하기에 이른다.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 간무왕 생모 고야신립을 모시다
마치 영조 임금이 천한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신분에 한이 맺혀 어머니가 죽은 뒤 소령원(경기도 파주시)을 지어 장사지내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어머니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교토의 히라노신사는 일본의 천년고도 새서울의 창시자인 간무왕의 생모인 백제여인 고야신립을 모시는 사당이다.
히라노신사는 교토역에서 시내버스로 20여 분 거리에 있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신사다. 일행이 기누가사고마에 버스정류장에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자 길 가던 아주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다. 히라노신사를 물으니 아주머니는 대뜸 “그곳은 봄의 사쿠라(벚꽃) 외에는 아무 볼 것이 없는 곳”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교토 관광 안내책자에는 사쿠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 외에 히라노신사의 유래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물론 백제여인 고야신립을 모시는 사당이란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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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들 간무왕 사당인 헤이안신궁 앞의 거대한 도리이(왼쪽)와 어머니를 모신 히라노신사의 작은 도리이(오른쪽). | ⓒ 인제신문 | |
그나마 히라노신사가 나와 있는 안내책자는 열에 하나이고 대부분 안내책자에는 히라노신사가 빠져있다. 그도 그럴 것이 천 년 고도 교토를 탄생시킨 간무왕의 어머니가 백제 여인이고 그 여인을 모시는 사당이 히라노신사인데 자랑스럽기보다는 감추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히라노신사는 《문덕실록(文徳天皇実録)》에 따르면 모셔진 4신의 지위가 높아 “신사(神社)”보다 격이 높은 “신궁(神宮)”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851년에는 종2위 (従二位)이던 것이 859년에는 최고위인 정1위(正一位)로 격상되었다. 또한 10세기 초 일본 고대 왕실 편찬문서인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도리이 편액이 “히라노신사 (平野紳士)”가 아니라 “히라노대사(平野大社)”로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히라노신사”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사자체가 관리가 안 되는지 입구부터 쓰레기통이 넘쳐 나는 등 품격 높던 신궁의 자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관광협회 발행 책자에도 오르지 못하는 초라한 3류 신사로 전락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일본기(続日本紀)》에 따르면 히라노신사 크기는 지금의 교토어소(京都御所)와 같은 크기였으나(平安尺으로1.5km 사방)현재는 예전의 약 8분의 1로 줄어들었다. (200m 사방) 또한 헤이안 시대 법전인 《연희식(延喜式)》에 따르면 전국 유일하게 황태자가 친히 제사를 모시던 신사라고 쓰여있다. 그 때문인지 경내에는 역대의 왕들이 드나들면서 심어놓은 능수버들 모양의 오래된 벚나무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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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히라노 신사 경내에는 사쿠라 나무로 우거졌는데 꽃도 없는 사쿠라 나무 숲에 사람이 찾지 않으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 ⓒ 인제신문 | |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 오늘의 히라노신사는 천 년 전의 영화를 잊은 채 찾는 이 없는 기나긴 침묵 속에 잠겨있다. 교토의 신 간무왕의 화려한 사당인 헤이안신궁에 견줄 수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 사당 히라노신사의 규모는 그 크기의 차이만큼 깊은 골이 패여 있는 느낌이다. 한국의 정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방치 되다시피한 사당은 일본인의 효사상마저 의심하게 한다.
저녁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무렵 찾은 히라노신사는 붉은 도리이(鳥居) 너머로 저녁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지척에 있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 기타노텐만궁이라면 사람들로 북적일 시간이지만 경내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자물쇠를 굳게 걸어 잠그고 신사관리인은 퇴근해버렸는지 신사는 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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