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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 이봉창,김지섭의사에 혼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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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옥.김영조의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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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02일(화) 23:38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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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의거 직전 한인애국단 가입선서를 하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태극기를 뒤로하고 사진을 찍은 이봉창 의사. 다만, 이 사진은 위조 논란이 있다. | ⓒ 인제신문 | |
“대심원장 화인(和仁) 재판관은… 피고 리봉창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하얏다. 때는 오전 9시 15분. 피고는 각오한 듯이 별로 안색도 변치 안코 창백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츰부터 나리는 가을비는 무거운 법정의 공긔를 더욱 무겁게 하엿다.”
위는 1932년 10월 1일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이다. 바로 일황 히로히토의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에 대한 일본 대심원의 선고 직후 모습을 보도한 것이다. 왕실 인사에 대한 범죄는 단심(單審)으로 형을 확정한다는 일본 형법 규정에 따라 재판이 진행됐다. 이봉창은 9월 30일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까지 내내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언론은 전했다.
사건 현장에서 무명옷을 입은 남자를 범인으로 체포하려는 일본 경찰에게 말쑥한 양복을 입은 이봉창 의사가 다가가 “그 사람 아냐! 나야!”라고 해서 체포되었고,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갔다. 이봉창 의사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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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쿠라다몽의 고려문, 여기서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던졌다. 한 일본인이 운동을 하러 고려문으로 뛰어들어가고 있다. | ⓒ 인제신문 | |
32살의 나이에 슬픈 나라의 운명을 한몸에 짊어지고 일황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던 이봉창. 그를 만나러 가는 우리의 가슴은 회색빛이었으나 밖의 날씨는 겨울 날씨인데도 화창했다. 구단시타(九段下) 전철역을 나오니 바로 눈앞에 황거(皇居)로 통하는 문이 바라다보인다. 이를 사쿠라다몽(櫻田門)이라 부르는데 이중문으로 되어 있어 앞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 부르고 안쪽 문은 와타리야구라몽(渡櫓門)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이봉창은 천황 일행이 황거로 들어가려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수류탄을 던졌다. 사쿠라다몽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황이 살고있는 황거(皇居)에 웬 고려문(高麗門)인가 싶겠지만 지금의 황거 건물은 도쿠가와 막부가 쓰던 에도성(江戸城)으로 성 주변에는 일명 고려문이라는 사쿠라다몽을 비롯한 에도성을 드나드는 많은 문이 있다. 외곽문 25개와 내곽문 11개가 있는데 이 가운데 주요 문이 고려문 양식이며 빗장이 없는 게 특징이다. 고려문은 임진왜란 당시에 들여온 기술로 에도시대 이후에는 성곽은 물론 절이나 신사(神社)의 출입문으로 각광을 받아 일본 전역에 고려문이 남아 있다. 뛰어난 건축기술인 고려문을 멀리서 응시하며 일황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가슴에 품었던 수류탄을 힘껏 던지던 그날의 거사를 고려문은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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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문 안으로 들어가면 네모난 광장이 있고, 적병을 막기 위해 총이나 화살을 쏘는 문 곧 와타리야구라몽(渡櫓門 ) 이 또 있다. | ⓒ 인제신문 | |
이봉창(李奉昌)은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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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쿠라다몽을 들어서니 왼쪽에 해자가 보이고 도쿄성 성벽도 보인다. 팻말엔 왼쪽으로 사쿠라다몽, 오른쪽으로 니주바시가 있다고 안내한다. | ⓒ 인제신문 | |
1931년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이봉창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황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의거 전인 12월 13일, 그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선서를 하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흘 뒤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는 눈물을 보이는 김구선생에게 “대사(大事)를 성취할 터인데 기쁘게 헤어집시다.”라며 위로한 큰사람이었다.
상하이를 떠난 이봉창은 1931년 12월 22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월 8일 요요기(代々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신년 관병식에 천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를 거사일로 잡았다. 그리고 1월 8일 사쿠라다몽 밖에서 관병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천황 행렬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일본 궁내부 대신의 마차를 천황의 것으로 잘못 알고 던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차 한 대가 파괴되는 정도에 그쳤다.
비록 이봉창의 일황 살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 사건이 국내외에 끼친 파장은 매우 컸다. 철통 같은 수비 속에서 천황의 마차 앞에 떨어진 폭탄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마차에서 내린 천황 일행은 혼비백산했다. 특히 이 사건으로 가라앉았던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는 도화선이 되었고, 나라밖 애국지사들이 속속 임시정부에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 사건은 그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이어졌다.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나선 것도 두 의사의 의거가 계기가 됐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는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여 중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일본 정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일본 내각이 모두 사직서를 냈고 경시청장 등은 파면되었다. 광복 후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모셨다. 이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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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거 안으로 들어가는 안경모양 다리 메가네바시가 보이고, 그 뒤엔 언뜻 니주바시(이중교)가 보인다. 이 니주바시에선 1924년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그친 사건이 있었다. | ⓒ 인제신문 | |
이곳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던진 사쿠라다몽(櫻田門)은 바로 일본 천황이 사는 황거(皇居, 고쿄)로 들어가는 성문 중 하나이다. 사쿠라다몽은 원래 내문과 외문이 있는데 내문인 길경문(桔梗門)은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고려문(高麗門)은 외문인데 보통 이곳을 사쿠라다몽이라 부른다. 이 외문도 이중구조여서 고려문을 들어가면 네모난 광장이 있고, 적병을 막기 위해 총이나 화살을 쏘는 문 곧 와타리야구라몽(渡櫓門) 이 또 있다. 사쿠라다몽은 사쿠라다 수로와 가이센 수로의 사이에 있는데 1961년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쿠라다몽의 정면에는 현재, 일본 경시청 청사가 있다. 이런 까닭에 일본 경시청을 흔히〈사쿠라다몽〉이라는 은어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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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거 앞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와 그가 쓴 편지 | ⓒ 인제신문 | |
사쿠라다몽을 지나니 거대한 공원과 해자 그리고 해자 건너에 황거가 멀리 보인다. 일본의 여느 성처럼 황거 주변엔 해자가 빙 둘러 있다. 그래서 황거로 들어가려면 정문에서 2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물에 비치는 모습이 안경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메가네바시와 그 뒤로는 있는 니주바시(二重橋)철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이 니주바시도 우리에겐 잊어서는 안 되는 장소이다. 그것은 1924년 1월 5일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황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려고 폭탄을 던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봉창은 천황을 없애고자 했고 김지섭은 아예 천황이 사는 궁성을 없애버리려 했다. 이 두 거사는 뜻한 바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김지섭은 새해 첫머리 도쿄에서 열리는 의회에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폭탄 투척을 하려고 1923년 12월 20일 3개의 폭탄을 지니고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더욱이 1923년 9월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에 희생된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번 의거 계획은 그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그러나 막상 도쿄에 도착하여 제국의회가 휴회 중임을 알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궁성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1924년 1월 5일 저녁 그는 궁성 니주바시 앞에 접근하여 우선 제1탄을 보초 경찰에게 던졌으나 불발되었으며, 다시 2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이 되어 정문 울타리 밖에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던진 3탄도 안타깝게 불발이 되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김지섭은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그는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8년 2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먼 이국땅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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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거 앞 광장에는 소나무가 잘 심어져 있다.(위) 광장은 대형 여객기 47대를 세울 만큼 넓다. | ⓒ 인제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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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거 부근 지도, 붉은 표시된 것 중 위는 니주바시, 아래는 사쿠라다몽 | ⓒ 인제신문 | |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 회원들이 사쿠라다몽을 찾았을 때는 넓은 공원에 많은 일본인이 산책을 하거나 운동복 차림으로 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눈에 이곳은 동네에 가까운 공원에 불과하지만 우리 회원들에게는 78년 전 가슴에 수류탄을 품고 이 공원 어딘가에 숨어서 거사할 틈을 노리던 이봉창 의사와 김지섭 의사가 떠올랐다. 저 소나무 숲 속 나무들도 우리의 두 애국지사를 보았을까? 아니, 저 하늘도 내려다보았으리라! 조선의 아들 이봉창과 김지섭이 가슴 졸이던 그날 그 시각의 거사를 말이다.
한 회원은 빈주먹을 불끈 쥐며, 사투라다몽에 수류탄 던지는 시늉을 한다. 일본 땅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한민족의 얼을 되찾아보려는 회원들이 이봉창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회원 중 누군가도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제국주의 우두머리인 천황을 응징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피를 이어받아서일까? 사쿠라다몽 주변에서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회원들은 성곽 주변의 해자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물속에 천황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이봉창의사와 김지섭 의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투지를 떠올리며 우리는 넓은 황거공원을 뒤로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쿠라다몽을 벗어나 황거공원을 지나 도쿄의 거대한 빌딩 숲이 자리한 마루노우치 빌딩가 앞 신호등에 섰다. 빨간신호였다. 신호등 건너편에는 일렬로 줄지어져 있는 사쿠라(벚)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제 예전의 일본 제국주의는 없다. 하지만,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져 버리는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꽃 사쿠라는 여전히 봄이 되면 또 필 것이다. 1970년대 초 국제무대에 일본이 다시 나오는 것을 뉴욕타임즈는 '벚꽃이 다시 핀다.'라고 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 만에 하나 일본제국주의가 부활하여 또다시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면 이봉창과 김지섭 같은 애국자가 나올 수 있을까?
올해로 91년째를 맞이하는 3.1절! 올해도 어김없이 그날은 찾아왔다. 유관순의 만세소리도 이봉창, 김지섭의 폭탄을 든 거사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온몸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던 그 열정적인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우리 겨레 수호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었다. 푸른신호다. 이봉창과 김지섭 의사가 혈혈단신 적지에 뛰어들어 민족의 울분을 토해내던 곳. 이 두 분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호등 넘어 황거공원과 멀리 보이는 니주바시와 사쿠라다몽을 다시 바라다보았다. 그곳에서 이봉창과 김지섭 의사는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이곳 황거를 찾는 한국인들이 사쿠라다몽과 니주바시 앞에서 황거를 쏘아보아야 하는 까닭은 이 두 분의 나라 사랑 혼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rhsls645@hanmail.net)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pine4808@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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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신문 기자 injenews@hanmail.net “새감각 바른언론” - Copyrights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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