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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봉 교수의 [제주 4․3 사건 유적지 자전거 기행 ②] 제주시내 유적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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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곳곳에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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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0일(화) 13:51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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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규봉 칼럼위원(배재대학교 교수) | ⓒ 인제신문 | |
남문로터리를 거쳐 칼호텔 건너편인 제주농업학교 터로 갔다.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 이라는 의미로 '전농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는 이곳에 1947년 7월부터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 2연대 등이 주둔했다. 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에 출입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한다."라는 포고령에 따라 제주농업학교는 운동장에 임시로 천막수용소를 마련하고 민간인을 무차별 연행하여 즉결처분하던 곳이었다. 11월과 12월에 제주 읍내 유지들 대부분 이곳에 연행되고 학살한 '유지학살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48년 6월 18일 박진경이 암살당한 곳이었으며 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역사의 현장인 제주농고는 76년 이전하였고, 대부분은 택지로 바뀌고 일부에 삼성초등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역사적인 흔적은 아무데도 없다.
유지학살사건 현장 흔적 없어
삼성혈을 지나 신산공원에 들어서니 4․3 해원방사탑이 있다. 4․3사건 50주년인 1998년에 만들어졌다. 50주년을 맞으면서 맺힌 억울함을 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4․3 해원방사탑'이라고 불린다. '방사탑'은 사악한 기운을 방어하는 탑이란 뜻으로 꼭대기에는 일반적으로 새 모양의 돌을 얹으나, 이곳에는 화합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얹고, 돌무더기 속에는 4․3 희생자 명단 등 4․3과 관련된 자료를 묻었다고 한다.
오후에는 11번 국도를 타고 제주여자중고교로 들어가는 사거리로 갔다. 사거리 왼쪽에 있는 작은 개천 이 박석내(또는 박성내라고도 한다.)이다. 이곳은 4․3 때 학살터로 이용되었다. 48년 12월 21일 조천면에서 "좁쌀 한 줌이라도 산에 올린 사람은 자수하라. 그러면 양민증을 발급해 준다."라는 선전에 자수한 150여명을 비밀리에 학살하고 불태웠으며, 23일에는 제주 유지들을 이곳에서 역시 비밀리에 학살한 후 불태웠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9연대는 12월 29일 2연대와 교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교체를 앞둔 9연대가 실적 올리기에 매달린 결과로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평화협정이 결렬된 장소인 연미 마을을 들리기 위해 중앙중학교 쪽으로 향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의 현장이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제주학살을 점화시킨 역사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48년 5월 1일 12시경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청년 30여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2채의 집에 불을 놓음으로서 시작되었다. 유격대원이 불을 놓은 청년을 추격했으나 사라졌고, 2시경 극우청년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유격대원이 사라진 뒤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진입하였다. 4시30분 경 9연대가 도착하자 경찰은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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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백명을 비밀리에 처형하고 시신을 불태운 박석내 | ⓒ 인제신문 | |
평화를 원치 않은 미군정
제9연대장 김익렬은 방화의 주범이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연미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하늘과 지상에서 동시에 같은 장면을 촬영하고 <제주도에서의 메이데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방화가 유격대에 의한 것으로 조작하고 경찰의 잔인한 토벌을 정당화한 점으로 보아 이 방화를 딘 방문 이후 치밀하게 사전 준비된 미군의 각본으로 추정한다.
국방경비대는 이 사건의 원인이 경찰의 강경한 탄압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5월 6일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이며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 김익렬 연대장은 조병옥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진경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의 무자비한 토벌정책에 반발하여 9연대 장병 41명이 총기를 탈취하여 유격대에 합류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 일정 마지막 순서로 99번 국도 해발 668m 높이에 있는 박진경 추도비를 찾아 갔다. 어승생악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천왕사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베트남전 기념비가 나온다. 이 기념비 옆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충혼묘지가 있다. 묘지 입구 오른쪽에 보니 뻘건 글씨로 그의 추도비가 정말로 서있다.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제주에 주둔한 경험이 있고 영어에 능통하였으며 강경진압에 동조하였다. 그는 연대장 취임사 중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하며 부임 기간 불과 한 달 열흘(48년 5월 6일~6월 18일)만에 대부분이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를 무려 6천여 명이나 생포한다. 그 공로로 미군정은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키나, 그는 진급 축하 파티 후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게 암살당한다. 그들은 암살 동기를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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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진경을 본받으라고 충혼묘지 입구에 아직도 세워놓고 있는가? | ⓒ 인제신문 | |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
그의 추도비는 1952년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세워졌다가 1985년 다시 세워진 비문에는 "제주도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고 쓰여 있다.
김익렬 연대장은 모두들 무장대와 협상하러 가기 꺼려하는 상황에서 초토화 작전을 막기 위해 한라산으로 올라가 단독으로 무장대와 4․28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또한 그는 오라리 방화 후 열린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여가며 강경진압을 반대하다 해임되었다.
반면 박진경은 초토화 작전에 불을 댕긴 장본인으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하며 부임 기간 불과 한 달 열흘 만에 무려 6천여 명을 희생시켰고 결국 암살당했다.
김익렬 장군(66년 육군 중장 예편)은 1988년 작고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살신성인한 그의 공덕비는 제주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박진경의 경우 그를 추도하는 비문이 아직도 충혼묘지 입구에 보란 듯 세워져 있다.
역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했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미 정부가 제주 4․3 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로 규정하고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은 아직도 박진경을 추도하는 비를 세워 놓고 정작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려 한 김익렬 장군의 존재는 알리지 않고 있으니, 제주도민은 육지 사람을 '육지것'이라고 욕할 자격이 있는지 쓴맛을 뒤로 하며 1시간을 걸려 올라온 길을 단숨에 내려갔다. 오늘 하루 주행거리는 44km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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