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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봉 교수의 [제주 4․3 사건 유적지 자전거 기행 ④] 제주 동북부 유적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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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베트남→ 광주, 학살은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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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4일(화) 12:19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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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규봉 칼럼위원(배재대학교 교수) | ⓒ 인제신문 | |
비행기 출발 시간이 4시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12번 일주도로를 따라 표선해수욕장에 들어섰다. 마침 썰물이라 백사장이 길게 뻗어있다. 큰 호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이곳이 바로 학살터였다. 1948년 11월에서 49년 초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가 군경에 잡혀 백사장에서 학살되었다. 가시리 마을에서는 500명 이상이 죽었고, 토산1리에는 4․3 사건을 겪은 남자가 한 명만 생존했다고 한다.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토벌대는 저질렀다. 아버지를 죽이면서 그 자식들을 불러 모아 만세를 부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발가벗겨 놓고 말도 안 되는 짓을 강요했다고 한다. 하얀 백사장을 따라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그 때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려 몸서리가 쳐진다.
한국판 쉰들러 문형순 서장
성산 일출봉으로 갔다. 성산 일출봉 터진목은 메워져서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지형적으로 볼 때 절이 들어서 있는 곳 같았다. 본래 성산 일출봉은 제주의 본섬과 떨어져 있었으나 40년대 초에 완전히 이어 놓았다. 일출봉 거의 다 와서 좁아진 길목인 '터진목'에서 성산지역의 청년들이 서청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반대쪽인 '우묵개'에서도 오조리 청년 20여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성산포에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의인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다. 그는 4․3 항쟁이 일어나던 1948년 당시에는 모슬포 경찰서장이었다. 이 때 군경은 "자수하면 살려준다"하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하였다. 군경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 다 부모 형제요 이웃이었기에 대부분의 주민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수하면 죽음뿐이었다.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나서 문서장에게 자수할테니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수한 100여명의 주민이 경찰서로 갔으나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서청 대원들이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마을 서기에게 자수서를 받도록 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하였을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는 예비검속을 마을마다 수백 명씩 하였다. 붙잡히면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문서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移行)'이라는 서명을 하여 총살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포 지역은 오직 6명만이 희생되었다. 문형순 서장은 만주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군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퇴직 후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다 쓸쓸히 삶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주도민을 살려낸 그를 기리고 알리는 공덕비는 어디에도 없다.
가해자에게는 항의도 제대로 못하고 의인은 기리지도 않는 민심에 실망하며 12번 일주도로에서 다랑쉬 마을터로 가기 위하여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길을 탔다. 비자림 못 미쳐 월랑봉이 나타났다. 이 산이 바로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 마을터와 동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랑쉬오름은 그 때의 아픔을 기억하는지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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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구가 콘크리트로 폐쇄된 다랑쉬 동굴이 있는 다랑쉬 오름. | ⓒ 인제신문 | |
유골조차 묻히는 것 허락하지 않아
다랑쉬 동굴에는 군경을 피한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948년 12월 18일 9연대 2대대는 이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모두 질식시켜 죽였다. 박석내 학살처럼 연대 교체를 앞두고 9연대가 무리한 전과 올리기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1992년 이곳에서 유골을 발굴했으나 노태우 정권은 이 유골들이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고 입구는 콘크리트로 막아 놓았다. 2002년 표석을 세웠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석을 또 파괴하였다.
아직도 가해자는 반성은커녕 사실을 숨기려고만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선흘로 향하였다. 가는 중에 목시물굴과 도틀굴이 있다. 목시물굴은 선흘 마을 사람들이 숨어살다가 대거 희생된 장소이다. 1948년 11월 25일~28일 사이 군인이 주변을 수색하다 노인을 발견하고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냈다. 수류탄을 까 넣고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끌어내 15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연행했다. 그들을 고문하여 알아낸 곳이 목시물굴이다. 현장에서 학살된 사람만 최소 70여명이나 된다. 또한 밴뱅디굴에 숨어 있는 사람도 찾아내 학살했다. 단지 해안마을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학살당한 주민이 1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선흘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다 주변에 쉬고 있는 동네 사람과 말할 수 있었다. 낙선동 성터를 찾는다는 말에 '왜 그곳에 가냐'고 묻는다. 이유를 말해주었더니 4․3 사건을 아냐면서 설명해준다. 그는 예상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 쪽 관련해 많이 쫓아다녀 귀동냥한 것이란다. 가끔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4․3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마을에서 일어난 일조차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주민에게 "9연대장 박진경을 추도하는 비문이 아직도 있는 데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당장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흥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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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한 낙성동성. 새로 복원되었으나 당시 비극적 상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 ⓒ 인제신문 | |
짐승만도 못한 함바 생활
낙선동 성터를 찾아가니 막 복원을 끝내 상태였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이 내린 초토화 명령은 학살의 시발점이었다.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정든 삶의 터전인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되었다. 소개(疏開)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즉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며, 부득이 적에게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해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작전"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한다는 기본 방침을 무시하고 무차별하게 주민을 학살해 버렸다. 전시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범죄행위가 과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인 국군 장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소개 과정에서 선흘 주민이 최소 120명 정도 희생되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해안마을로 간 주민은 굶주림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1949년 봄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마을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선흘 아래에 전략촌인 석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낙성동성이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짐승 우리와 같은 함바집에서 짐승처럼 삶을 유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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