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최병헌의 漢詩 感想 [56]
|
|
2016년 11월 07일(월) 16:46 [인제신문] 
|
|
|

| 
| | ⓒ 인제신문 | 峻嶺盤回入太空/준령(峻嶺)을 받치듯이 먼 하늘이 돌아들고
長林幽隨暗蒙蘢/깊은 곳 숲은 아득하고 무성하여 어둡구나
兩山南北千峯裏/남북의 양산은 천 봉 속이고
一路東西萬木中/동서로 뻗은 길은 많은 나무 속이네
困馬凌兢愁積雪/벌벌 떠는 곤한 말은 눈 쌓일까 걱정하고
疾身憔悴怯當風/쇠약하여 병든 몸은 바람 불까 걱정이네
詩逢勝地終難就/승지(勝地)라 시 한 수 매듭짓기 어려워
縱就還慙語不工/부끄럽게 돌아서며 바쁘다고 변명하네.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成俔)의 <.踰所冬羅嶺/소동라령을 넘으며>라는 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이고, 시호(諡號)는 문재(文載)다.
1462년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경연관, 예문관수찬,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작품세계는 민간의 풍속을 읊거나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하는 등 새로운 발전을 모색했다. 명문의 후예로 비교적 평탄한 벼슬생활을 했으나 정치의 실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62세 때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에 올라 이 시기의 문풍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글씨를 잘 썼고 음률에도 밝아 유자광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위의 시 <소동라령을 넘으며>는 지금 한계령을 넘으며 지은 시다. ‘옛적에 우리말 이름은 ’바드랐재‘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한계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포장도로가 나서 다소 수월하게 넘을 수가 있으나, 예전에는 말을 타고 넘기도 힘든 고갯길 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미시령 쪽으로 길을 변경하였다가, 다시 한계령 쪽으로 옮겼는데, 그 길이 피례 원진계곡으로 연결된다.
詩逢勝地終難就/승지(勝地)라 시 한 수 매듭짓기 어려워
縱就還慙語不工/부끄럽게 돌아서며 바쁘다고 변명하네.
승지(勝地)임에는 분명한데 시 한 수 읊기가 힘들어 바뿐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한다는 내용이 재미를 더한다. 옛적에 한 나무꾼이 산에만 갔다 오면 선녀를 만났다면서 용모가 어떻다고 자랑을 일 삼더니, 하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연유를 물었더니, 정말로 선녀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하기가 힘들어서였다는 설화가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
|
|
|
인제신문 기자 injenews@hanmail.net “새감각 바른언론” - Copyrights ⓒ인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인제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인제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