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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난화 매운향기,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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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천인문학열전-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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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2일(화) 21:13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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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좌훈 (인제신문 발행인 겸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이사) | ⓒ 인제신문 | | □ 3.1 만세운동을 이끌다
기미년 3월 1일, 만해는 계동 43번지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손병희를 비롯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속속 태화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민족대표들은 애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기로 했으나 분노한 민중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을 우려해 태화관으로 바꾼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모두 숙연해졌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만해는 민족 대표들 앞에 섰다.
"우리는 이제 대한독립을 세계만방에 엄숙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기필코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것을 믿습니다. 독립이 선포된 이상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민족은 그동안 간악한 일제의 철쇄를 풀고 자유 천지를 향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만해는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민족대표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합창했다.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이 끝나갈 무렵, 7~80여명의 정사복 일제 헌병들과 경찰이 태화관에 들이닥쳤다. 만해와 민족대표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중부경찰서로 끌려갔다가 남산 총감부로 이송, 구금됐다. 그들이 끌려갈 때 시내 곳곳에서는 남녀노소 시민이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경찰서로 압송되어가는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바라 본 만해는 훗날 이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상처였다고 회상했다. 구금된 민족대표들은 그날 저녁부터 개별적으로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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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미독립선언서 | ⓒ 인제신문 | |
□ 옥중의 기개, 진정한 민족지도자
남산 왜성대 총감부에서 3.1운동 지도자로 조사받은 민족대표들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됐다.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고문과 문초를 겪어야 했다.
일제는 이들에게 내란죄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몰고 갔다. 민족대표 중 어떤 사람은 고통과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이렇게 있다가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평생 감옥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불안과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태도를 짓던 만해는 일부 민족대표의 이런 행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대들이 정녕 민족대표로 도장을 찍은 자들이란 말인가!” 감방 구석에 놓인 오물을 던져버렸다.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해 조금도 굽힐 줄 몰랐던 만해의 실천적 면모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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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선포하는 민족대표 | ⓒ 인제신문 | |
□ 옥중에서 만해의 세 가지 원칙
만해는 옥중에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들이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다. 내가 내 나라를 찾자는 것인데 누구에게 변론을 받을 것이며, 온 나라가 감옥인데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호의호식하자고 독립운동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만해는 철저하게 자신이 세운 원칙을 실천했다. 그 때문에 일제 경찰과 검사, 판사의 심문에 항상 의연했다. 시종 일관 꿋꿋한 기개와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고, 재판과정에서도 이런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옥중에서 만해가 얼마나 꿋꿋한 태도를 유지했는가는 일제의 신문조서에 잘 나타나있다.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조선사람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할 것이니 벌을 받을 일이 없을 줄 안다.”
“언제든지 그 마음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라며 민족지도자로서의 의연한 자세와 기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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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당시 수형기록부 사진 | ⓒ 인제신문 | |
□ 법정에서 만해의 최후 발언
1920년 10월 민족대표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만해는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 등과 함께 당시 법정 최고형인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 공약3장 추가, 재판과정에서의 굽힘 없는 투쟁 등이 최장기 형을 받게 된 요인이다.
만해는 최후 발언에서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무릇 정치란 덕을 닦는데 있지 위력을 과시하는데 있지 않다. 일제가 강병만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마침내 패망할 것을 알려 두노라.”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만해의 정연한 논리와 탁월한 식견은 담당했던 일본인 검사로 하여금 “당신의 이론은 정당하나 본국 정부의 방침이 변치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 고 실토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만해의 독립사상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조선독립의 서> 이다. <조선독립의 서>는 만해의 꺾이지 않는 기상과 물러서지 않는 용기, 탁월한 식견으로 탄생한 민족독립운동의 최대 성과물이자 독립운동 정신의 백미로 꼽힌다.
만해는 죄수 신분으로 철창에서 온갖 박해로 신음하면서도 그 소신에는 추호의 굽힘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통렬하게 반격했다. 만해에게는 실로 민족의 대표들을 대표 할 만한 기개와 의지가 넘쳤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만해는 세속을 초월한 선사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좌선에 몰두하는 그는 언제나 활불처럼 싱그러웠다.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총동원 체제 하에서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친일로 변절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풍난화 매운 향기 님에게야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위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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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 ⓒ 인제신문 | |
위당 정인보 선생은 만해 한용운 선사를 일러 "풍난화 매운 향기"라고 했다. 일생을 자유, 평등, 평화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살다 가신 만해 한용운 선사는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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