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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기의 시 읽기, 삶 읽기

시에게 길을 묻다 - 31

2021년 11월 23일(화) 16:41 [인제신문]

 

ⓒ 인제신문

↑↑ 손흥기 (본지 논설주간, 문학평론가)

ⓒ 인제신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틀 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애호박 넓은 잎새 위로, 소담한 콩포기 위로 내가 좋아하는 비가 자박자박, 투덕투덕 내리고 있습니다. 꿈 많던 청춘시절 우리들이 단골로 가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학교 담장에 간신히 기대여 기우뚱하게 서 있는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집.
간판도 없이 유리로 된 미닫이 문에 ‛할머니 집, 부침개, 라면, 돼지껍데기, 닭발’이라고 아주 서툰 글씨로 써 있던 그 집은, 우리들 ‘비마을 사람들’의 아지트이기도 했지요. ‘비마을 사람들’은 이렇다 할 회칙도, 정기적인 모임도, 회장도 없는 이를테면 되고 말고 한 그런 모임이었는데요, 비 가오는 날이면 모여서 술 마시는 애주가, 혹은 주당들의 모임이었지요.
아침부터 주룩주룩 기다리던 빗님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강의고 뭐고 집어치우고 우리들은 하나 둘 씩, 마치 그림자처럼 󰡐할머니 집󰡑에 모여들어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거나 추적추적, 주룩주룩, 자박자박,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안주삼아 술잔을 돌리고는 했습니다.
아, 그랬지요. 그 때 우리들은 뚜아에 무아의 약속을, 양희은의 내님의 사랑을,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김태곤의 송학사를 꺼이꺼이 부르고는 했지요.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악을 쓰다가 누군가는 울기도 하고, 누군가는 고함을 치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고, 어떤 가난한 사랑이 시작 되여 연탄불 꺼진지 오래 된 자취방의 군용담요 속으로 깃들어 떨리는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지요.
가난했고, 외로웠으나 또한 더 없이 부자였고 행복했으며 가슴 따듯했던 시절. 그 벗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친 먼지바람 부는 어느 길모퉁이 기름때 얼룩진 목노집에서 쳐진 어깨, 흐려진 눈으로 빛나던 청춘의 한 때를 반추하고 있는 것인지.
오늘 밤도 우리 집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잠속으로 빠져들겠습니다. 모두 아름다우시기를, 더불어 행복하시기를, 누군가를 사랑하시기를.

인제신문 기자  inje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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