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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와 조선독립의 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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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린천 인문학 열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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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03일(월) 18:55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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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좌훈 (인제신문 발행인 겸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이사) | ⓒ 인제신문 | |
□ 치열하고 격조 있는 옥중투쟁
3년 간의 옥중생활에서 한용운은 의연했으며, 수감 중 ‘3대 투쟁 원칙’을 세워놓고 실천에 옮겼다. 첫째, 변호사를 선임하지 말 것,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둘째, 사식을 받지 말 것,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 하지 않은 이상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이러한 3대 원칙을 세워놓고 옥중에서도 철처하게 항거했다.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만해는 검사의 심문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많다. 서면으로 답변 할테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장문의 논설을 썼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사해(死骸·송장)와 같고 평화가 없는 자는 다시없는 고통이다. 압박을 받는 자의 주위는 무덤과 다름없고 쟁분(爭奮)을 일삼는 자의 환경은 지옥이 되나니 우주의 이상적 가장 행복한 실재(實在)는 자유와 평화다. 그렇기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기고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태(甘飴)처럼 맛보나 이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일지로다.“
무려 8천여 자(200자 원고지 60매 분량)의 장문의 글에서 만해는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조선민족의 정치적 운명을 간섭할 수 없다. 평화를 지키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가를 역설했다.
한용운은 만기 출옥을 3개월 정도 남겨두고 1921년 12월 22일 최린, 오세창, 김창준 등과 함께 가출옥했다. 출옥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그는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라며 "경전으로는 여러 번 읽었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인데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속에서도 쾌락으로 지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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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용운이 옥중에서 쓴 원고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 ⓒ 인제신문 | |
만해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일제가 주는 배급식량을 일체거부하고 냉골에서 생활하다 조국광복을 1년 남짓 남겨 놓고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인 조지훈은 만해 한용운을 두고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요, 애국지사요,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라고 상찬했다. 또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했으며, 벽초 홍명희는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일생을 자유, 평등, 평화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살다 가신 만해 한용운 선사는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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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용운의 출옥소감 (동아일보, 1921.12.24.) | ⓒ 인제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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