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인제군 항일투쟁 역사, 최병헌 향토사학자에게 듣는다<2>
|
|
인제군의 항일역사 발굴·기록 … 후손 찾아 명예 회복에 앞장
|
|
2023년 11월 07일(화) 15:35 [인제신문] 
|
|
|
인제군 최병헌 향토 사학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도,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묵묵하게 인제군의 항일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후손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72년 인제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최 향토 사학자는 1970년대 후반 예산 한 푼 없이 군지를 제작하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만큼 얻는다는 진리처럼 최 향토사학자는 이때부터 지역 항일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인제신문사는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찾고자 했던 선조들의 민중 항거를 찾아 기사를 연재한다.<성낙규 기자>
1편, 정원팔 항일투쟁, 전봉엽 독립운동 투쟁
2편, 김종철 항일의병, 이동근 독립운동, 김옥인 독립운동
인제신문은 인제 항일독립운동가를 연재하며 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인물을 찾는 일은 물론 기존에 관리되고 있는 이들로 포상에서 누락됐거나 포상 미전수자의 유족을 찾는 일을 추진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신념 하나로 가족의 안녕도 도모하지 않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까지 총부리 앞에서 굴하지 않았던 인제군 선열들의 얼을 되살려내고 선양하는 것이 인제의 경쟁력이고 미래다. 이에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제보는 물론 후손에 대한 제보(전화:033-461-1588, E-mail:injenews@daum.net)를 기다리고 있다.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사동 출신 김종철 항일의병
김종철(金鍾鐵 1880년 3월 24일~1917년 4월 19일)은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사동(寺洞) 출신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佳坪里)가 주소지다.
그의 본명은 종환(鍾煥)이고. 이명(異名)으로 광옥(光玉). 종철(鍾喆) 이란 이름을 썼다.
1907년 고광순(高光洵)의 진에서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다가 8월경 인제에서 박화암(朴化巖)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관포수 등 1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 2월경 일본군 영양수비대 병사들에게 체포됐다. 김종철은 강릉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탈출했으며, 이후 가족을 인솔하고 정선·삼척 등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숨어 살았다. 1909년 3월경 경북 봉화에 이주해 주막을 경영하면서 김종철이라 개명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일제의 무자비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목격하고서 분개해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김종철은 이전의 의병동지들을 규합해 부대를 조직한 후 친일관리와 밀정 등 부일배를 처단했다. 그리고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1910년 음력 3월에는 김문도(金文道)와 김중삼(金仲三) 등 부하 의병들과 함께, 인제군 내면 소한리(小閑里)에 살던 내면 면장 김시원(金時元)이 의병을 밀고하는 등 일본경찰에 협조한 데 분개하여 김시원을 처단하려 했으나, 부재중이어서 김시원의 집을 불태웠다.
같은 해 음력 5월 30일에는 김국서(金國瑞) 등 부하 의병 4명과 함께 인제군 기린면 서리에 살던 일진회원 엄윤문(嚴允文)을 총살해 처단했다. 엄윤문은 김종철의 친족과 옛 부하에게 박해를 가한 바 있다.
1913년 음력 11월에는 이종서(李鍾西) 등을 이끌고 강릉시 연곡면 퇴곡리 유동의 정현삼(鄭顯三) 집에서 군자금과 군수용품을 징발했다. 1915년 5월에는 김종근(金鍾根)·장명수(張命壽)· 김원실(金元實)· 정대성(鄭大成)과 함께 홍천군 두촌면의 하영도(河影圖)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이들과 함께 강릉시 연곡면 장천리에 들어가 자신들을 밀고한 박군팔(朴君八)을 총살했다. 그 후 체포되어 1916년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7년 4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95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 | ↑↑ 김광옥, 김종철, 김원실 취조 보고서 | ⓒ 인제신문 | |
| 
| | ↑↑ 폭도 수괴에 대한 취조 보고서(김종철) | ⓒ 인제신문 | |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290∼300면, 조선총독부관보(1917.4.24.), 판결문(경성지방법원,1928.10.02.),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8.12.12.), 중외일보(1928.10.02./10.03), 동아일보(1927.12.02.), 조선일보(1928.10.04.)
인제군 북면 한계리 출신 이동근 독립운동가
이동근(李東根 1899년 5월 18일~ ?)은 인제군 북면 한계리 963번지가 본적이고, 인제군 북면 한계리 963번지가 주소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약소민족의 국민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이에 고무돼 많은 지식인이 민족자결주의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전국에 전달했다.
이동근은 1919년 3월 말 전국의 만세운동 소식이 강원도 인제의 고향 마을에 전해지자, 4월까지 이어진 만세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6월 2일 춘천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2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제2권 558~559면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출신 김옥인 독립운동가
김옥인(金玉仁 1902년 1월 20일~)은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96번지가 본적이고, 홍천군 홍천면 신장대리가 주소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같은 해 4월 1일 오후 1시경 홍천군 신장대리(新場垈里)에서 주민 200여명이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군청으로 밀고 들어가자, 잡화상(雜貨商)을 하던 옥인도 차봉철(車奉哲). 강춘일(姜春日). 주춘복(朱春福). 이종섭(李鍾燮). 최흥길(崔興吉). 추은명(秋殷明). 노동근(盧東根) 등과 합세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외치다가 체포되어 90대의 태형(笞刑)을 받았다. 이 공로로 지난해 정부는 대통령표창에 서훈했다.
| 
| | ↑↑ 김옥인의 판결문 | ⓒ 인제신문 | |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06.12.) 성낙규 기자 nk_2232@naver.com
|
|
|
|
인제신문 기자 injenews@hanmail.net “새감각 바른언론” - Copyrights ⓒ인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인제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인제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