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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해 희생했는데”…인제군, 정부 인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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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항일투쟁 역사, 최병헌 향토사학자에게 듣는다<3>

인제군의 항일역사 발굴·기록…후손 찾아 명예 회복에 앞장

2023년 11월 21일(화) 12:14 [인제신문]

 

↑↑ 최병헌 향토사학자

ⓒ 인제신문


인제군 최병헌 향토사학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도,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묵묵하게 인제군의 항일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후손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72년 인제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최 향토사학자는 1970년대 후반 예산 한 푼 없이 군지를 제작하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만큼 얻는다는 진리처럼 최 향토사학자는 이때부터 지역 항일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인제신문사는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찾고자 했던 선조들의 민중 항거를 찾아 기사를 연재한다.<성낙규 기자>

1편, 정원팔 항일투쟁, 전봉엽 독립운동 투쟁
2편, 김종철 항일의병, 이동근 독립운동, 김옥인 독립운동
3편, 장조민 항일투쟁, 서병선(병탁) 독립운동, 김동완 독립운동

인제신문은 인제 항일독립운동가를 연재하며 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최병헌 향토 사학자와 함께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는 동시에 기존에 관리되고 이들의 업적도 지속해서 발굴해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포상 미전수자의 유족을 찾는 일도 추진하고 있다. 이에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제보는 물론 후손에 대한 제보(전화:033-461-1588, E-mail:
injenews@daum.net)를 기다리고 있다.

장조민(張朝民), 1907년 1월 19일~1967년 2월 1일
장조민의 본적은 평안북도 선천이며, 1907년 1월 9일에 만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주소는 인제군 남면 신남리 유목동이다.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1922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입대하며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1924년 5월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齋藤實) 총독을 기습해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이 됐다. 1928년 6월까지 중국·만주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그 후 1936년경까지 조선혁명군으로 독립투쟁을 이어오다 중국인 산둥유격대에 편입해 부관으로 활약했다. 1942년 6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와 상봉해 초모위원회(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 모집) 부주임으로 임명돼, 지방공작대원을 지도했으며 제3지대 창설에 참가했다.
1943년 10월 광복군에 입대하고, 3월에는 일본군대에서 한국 국적의 학도병을 탈출시켜 한광반(韓光班,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조직 편성하는 데 일조했다. 그해 10월까지 훈련해 한광반 55명을 한국임시정부로 파송했다.
그는 1945년 3월에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8월에는 중국 각 지역에 군사시파단(軍事時派團)을 조직 운영하면서 귀덕지구(歸德地區) 특파단장으로 임명돼 송병하·오세일·오일립 등 대원을 통솔해 교포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귀국을 도왔으며, 이후 귀국한다.
장조민 독립투사는 1967년 3월 1일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며, 유해는 서울 광복군묘지에 봉안됐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3년 8월에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대통령 표창에 서훈됐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됐다. 또한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장조민 항일투사의 중년의 모습

ⓒ 인제신문


↑↑ 장조민 항일투사의 말년의 모습

ⓒ 인제신문



서병선(병탁, 徐秉善,秉卓) 1900년 9월 26일~1973년 5월 20일
서병선의 본전은 인제군 인제면 남북리 289번지이며 주소는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159번지다. 그는 1919년 3월 인제군청 고원(일제 강점기에 일본정부에서 서기 업무를 담당해 온 비관리의 한 종류)으로 재직 중 인제감리교회 전도사였다가 홍천감리교회에서 근무하던 원익상(元翊常)의 소개로 춘천 감리교회 이병찬(李炳燦) 목사와 김흥범(金興範), 교회권사인 정경운(鄭慶雲)을 통해 독립선언서 수십 매를 인수해 귀향했다. 그는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인제읍 남북리 포곡동(浦谷洞)의 조경운(趙慶雲) 집에서 이성종(李聲鍾)·이종근(李鍾根)·심한구(沈漢龜)·김명석(金明錫)·고봉윤(高鳳允) 등과, 3월 29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궐기문을 작성했다. 본인은 인제면 일원을 책임지고, 170여명의 지사를 규합해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섰다. 이종근은 합강리, 심한구는 덕산리, 이성종은 보통학교를 각각 담당해 군중동원을 책임 맡고, 독립선언서와 궐기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위 참여를 촉구하는 선전문을 각지의 요소에 부착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3월 27일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2년여간 군청에 다시 근무하였으며, 1949년에는 평창봉평중학교 설립발기인으로서 활동했다. 그 뒤에도 농촌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독립운동과 농촌계몽운동 유공자로 도지사상을 수여하였고, 1993년에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표창됐다.
말년에는 서화면 천도리 양지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연고자는 장남 준택(準澤)이 있었으나 현재는 작고하고 손녀 성자(成子)가 강릉시 사천면에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태백항일사(조동걸, 1977년. 5월. 1일/ 120·121면), 인제군지(인제군지편찬위원회, 1980년 5월 20일 /186면)

↑↑ 서병선(병탁) 독립운동가 중년의 모습

ⓒ 인제신문



김동완(金東完/日名 金谷永倉) 1922년. 5월. 8일 ~?
김동완의 본적은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 354번지이며 주소는 경성부 범동 108번지다. 그의 활동내역을 살펴보면 일본식으로 개명한 이름은 금곡영창(金谷永倉)으로 조부는 상필(商弼)이고 부친은 강원도회의원과 인제국방의회장을 역임한 영제(永濟)이며, 형제자매로는 위로 동순(1914 숙명여고졸). 동화·동자가 있고, 아래로는 동희·동린이 있다.
김동완은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경성사립보성중학교 4년을 수료 후, 1941년 4월에 대학 입학 수험을 위해 상경해 금원가정(金原佳正, 본명 김규엽)등과 교류하면서 그의 조선독립운동 계획에 감화 받아 농촌 계몽에 나섰다. 이를 발판으로 조선독립운동을 실행할 것을 협의하다가 체포돼, 1943년 4월 23일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았다.
그의 판결문에는 <피고인 금곡영창(김동완)은 경성사립보성중학교 4년 수료 후 1941년 9월 일본대학 예술과 예·창작과에 입학해 재학 중인 자로 1941년 4월 상급학교 입학시험 수험을 위해 상경해 피고인 금원가정(김규엽)과 교류하면서 감화를 받아 조선독립을 학수고대하기에 이른 자이다>라고 명시됐다.
김규엽은 1941년 5월 하순경 당시 인제군 인제면 합강리에 거주하고 있던 김동완에게, <자신은 현재 법률을 공부하고 있으나 너와 똑같이 문학에도 취미가 같으므로 장래 문학을 통해 조선사회를 위해 공헌할 각오가 되어있다. 너도(김동완) 자중하고 분투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자 김동완은, 5월 25일자로 <피를 달리하는 민족의 도시에서 굳게 싸우고 있는 형에게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나도(김동완) 역시 강력하게 싸우겠다고 무언의 맹세를 바람에 실려 보내니 앞창이 흔들리면 그 편지라고 생각해 줘.>라고 적은 서신을 보냈다.
또한 그해 9월 30일경 김용남(일본명 금전광성 金田光成)에게 <자신은 드디어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조선민족을 위해 배우고 일할 각오가 되어있다. 이때 우리들이 운동하면 조선의 독립은 실현될 것이니 함께 운동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들이 민족운동을 하는 데는 숱한 곤란이 있을 것이나, 이를 타파하고 강철주의로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고 기록돼 있다.
동완은 김규엽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져왔으며, 주위의 동료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함은 물론 사회 계몽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형을 받았다. 이에 정부는 2022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애족장에 서훈했다.
참고문헌은 신분장지문 원문, 판결문(전주지방법원. 1943년 4월 23일)
성낙규 기자

인제신문 기자  inje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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