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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항일투쟁 역사, 최병헌 향토사학자에게 듣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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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의 항일역사 발굴·기록…후손 찾아 명예 회복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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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05일(화) 20:33 [인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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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최병헌 향토사학자 | ⓒ 인제신문 | |
인제군 최병헌 향토 사학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도,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묵묵하게 인제군의 항일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며, 후손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72년 인제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최 향토 사학자는 1970년대 후반 예산 한 푼 없이 군지를 제작하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만큼 얻는다는 진리처럼 최 향토사학자는 이때부터 지역 항일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인제신문사는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찾고자 했던 선조들의 민중 항거를 찾아 기사를 연재한다.<성낙규 기자>
1편, 정원팔 항일투쟁, 전봉엽 독립운동 투쟁
2편, 김종철 항일의병, 이동근 독립운동, 김옥인 독립운동
3편, 장조민 항일투쟁, 서병선(병탁) 독립운동, 김동완 독립운동
4편, 마영규(응섭) 항일투쟁, 전봉학(성오) 항일투쟁, 정재근 항일투쟁
인제신문은 인제 항일독립운동가를 연재하며 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최병헌 향토 사학자와 함께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는 동시에 기존에 관리되고 이들의 업적도 지속해서 추가 발굴해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포상 미전수자의 유족을 찾는 일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에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제보는 물론 후손에 대한 제보(전화:033-461-1588, E-mail:injenews@daum.net)를 기다리고 있다.
마영규(응섭)(馬英奎, 應燮 1894~1929)
마영규는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가 본적이고,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에 살았다.
그는 1894년 8월 10일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에서 부친 마용기씨와 어머니 해주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부터 인제읍 귀둔리에 거주하였으며, 일명 응섭이라고도 부르는데 호적명은 영규(英奎)이고, 남룡(南龍)이라는 이름도 썼다.
1921년 9월 의병활동을 하던 마정삼과 박영관이 일본군토벌대에 의해 살해당하자, 마정삼의 아들이자 형님인 만봉·뇌병·도현과 박영관의 아들 순구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홍천에 장총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했다.
1921년 9월 홍천군 두촌면 어은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926년 9월 13일에는 김석규·전봉학·전봉엽 등과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1927년 11월까지 춘천군·홍천군·인제군 등지에서 6년간 24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집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됐다.
1928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미수·강도·강도살인·강도미수라는 죄목으로 김석규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자,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1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동일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이듬해 2월 29일 판결이 확정되어 동년 4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해 지난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후손으로는 아들 종완이 있었으나, 무자였다. 연고자로는 둘째 형 도규의 손 택수(1940~)와 증손 상근(1958~)과 석근(1958~)이 춘천시 동면 품걸리에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8년 10월 2일),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8년 12월 12일), 판결문(고등법원. 1929년 2월 28일), 동아일보(1928년 9월 24일·26일, 12월 1일), 조선총독부관보(1929년 4월 11일) 조선일보 (1928년 10월 4일, 12월 1일·14일, 1929년 9월 15일)
전봉학(성오)(全鳳學, 成五 1890~ 1932. 6. 25.)
전봉학은 인제군 남면 신풍리가 본적이고, 춘천군 북산면 조교리를 주소로 뒀다.
그는 마영규와 함께 홍천에서 장총단에 가입한 인물이다.
1921년 9월 홍천군 두촌면 어은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922년 10월 5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춘천군 동면에 거주하는 김영주의 집에서 12구경 엽총 1자루와 실탄 17발. 공포탄 3발을 획득하였고, 이후 각각 엽총과 화승총. 곤봉등으로 무장해 군자금 모집에 활용했다.
1923년 6월 3일 홍천군 두촌면의 경찰관 츠유자키요시오(津留崎良夫)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1924년 12월 28일에는 춘천군 북산면 청평리에서 거주하는 정규영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5년 4월 15일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에 거주하는 하영도의 자택에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9월 13일에는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에 거주하는 유익렬에게서 군자금을 출자 받았다.
1926년 9월 13일 밤 9시경 전봉학은 마영규와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 유익렬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인제의 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1927년 11월까지 강원도 춘천군 북산면·홍천군 내촌면·인제군 남면 등지에서 6년간 24차례에 걸쳐 군자금모집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1928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미수, 강도, 강도살인 및 강도미수로 박순구와 더불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2년 6월에 경성형무소에서 순국했다.
2010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판결문(경성지방법원:1928년 10월 2일), 중외일보(1928년 10월 3일, 10월 4일),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28년 12월 12일), 동아일보(1927년 12월 2일), 조선일보(1928년 10월 4일).
정재근(鄭在根 1891~1909)
정재근은 인제군 서화면 사천리 전동이 본적이고,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에 살았다.
그는 1907년 인제에서 진광옥 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 2월에 장연수의 진에 가담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됐다.
이듬해 3월 경성공소원에서 살인내란 및 강도죄로 교수형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재판소:1909년 5월 7일), 관보(내각법제국관보과, 1909년 6월 22일, 7월 2일),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집 248~250면
성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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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영규(응섭) 판결문 | ⓒ 인제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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